정일당 강씨(1772-1832)는 1772년 10월 15일에 태어난 조선시대의 여류시인으로, 정일당 강씨의 아버지 강재수씨는 문장력이 상당한 수준이었고 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머니 안동권씨는 천성이 단정하고 정결하며 총명하였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지성으로 섬겨서 아침 저녁으로 정성의 예를 극진히 하고 옆에 앉아서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바느질도 잘하고 음식 솜씨도 좋아서 길쌈하고 마름질 하는 법이며 삶고 찜하고 나물 무치고 양념하는 일은 반드시 부모의 몸에 편하고 입에 맞게 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했으며 부모가 병환이 생기면 밤새도록 옷을 벗지않고 약 달이고 죽 끓이는 일은 반드시 손수 하였다. 날마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집안 일을 처리하고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드는데 어떤 때는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였으나 힘들다 말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게으름을 피고 놀기를 좋아해서는 안된다'고 늘 경계하였다. 일 없을 때에 단정히 앉았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이라도 그 앞에서 감히 상스러운 말과 너털웃음을 짓지 못했으니, 당신 몸을 단속하고 남에게 늘 존경을 받았다.
시집 보내는 날 딸에게 경계하시기를 "시어머니께 효도하고 남편을 잘 공경하고 시누이와 동서간에 화목하게 하여라. 이게 나의 소원이다. 사람이 부귀하는 것이 본래 운명이 정해놓은 것인데 가난한 선비의 아내가 이런 뜻을 모르고 매양 가난한 것이 싫은 생각만 하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 가르쳤다 한다.
이처럼 모든 일에 있어 덕성과 부덕으로 몸소 가르친 친정어머니의 엄격한 예도에 따라 철두철미한 가정교육속에 자랐다. 정일당은 성질이 곧고 단정하였으며, 좋고 언짢은 것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어려서부터 여러 아이들과 장난을 하지 않았다. 드나들 때에 문지방을 밟는 예가 없었다. 몸은 약하여 병이 많았으나, 모든일에 적극성이 뛰어나서 여자가 해야할 일을 잘했고, 집안을 깨끗이 치우고 어른의 심부름 하는데 조심조심 부모님의 명령에 잘 따르니 사람들은 모두 '하늘이 낸 사람이다!'고 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너무도 기특하고 사랑스러워서 '전에 너의 어머니는 우리 권씨 문중에 제일가는 부인이라 하셨는데 지금 너는 꼭 어머니를 닮았구나!' 하셨다.
여덟살 때에 그 아버지의 가르침인 '옛 글에 여자는 잘못하는 일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어야 한다.'는 것과 '밤에 나가면 반드시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말을 외우며 가르쳐주니 정일당은 한 번도 그 말씀을 어긴 일이 없었다. 집이 몹시 가난해서 어머니를 따라 바느질도 하고 길쌈도 하느라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니 어머니가 잠깐 쉬라고 하더라도 '힘도 들지 않고 자고 싶지도 않다'라고 하여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케 해 드렸다고 한다.
강정일당은 19세 때에 여섯 살 연하인 윤광연과 결혼하였다. 결혼식을 치르고도 가세가 어려워 남편에게 가지 못하고 3년동안 친정에서 지낸 후에야 시댁으로 갔다고 한다. 남편 윤광연씨는 선비집안이면서도 가정이 어려워 학문을 하지 못하다가 결혼후에 정일당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결혼 후에 남편을 학문의 길로 들어서게 한 정일당은 기회있을 때마다 친구처럼 스승처럼 남편을 타이르고 안내하여 스승을 찾고 친구를 좋게 사귀어 덕을 길러 나가도록 배려하였고 아내로서의 덕성을 보여주었다. 정일당의 남편 윤씨의 기록에 보면, "내 아내는 시를 가끔 지었는데 그것은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깨우치는 말이었다. 문장을 화려하게 쓴 것도 아니고 모두가 나의 몸을 닦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게 하는 일에 대하여 썼다. 항상 근면한 것이며 학문에 있어서는 성(誠)과 경(敬)을 위주로 하였고 공부에 있어서는 언제고 이치를 깨달아 지식을 명확히 하였으며 그것을 실천에 옮길 것을 주장했으니 조목조목 자연으로 경서의 뜻에 맞는 것이었다."
정일당이 결혼식을 올리고도 3년간 친정에서 생활할 사이 시아버지께서 사돈집에 다니러 간 일이 있었다. 십여일을 머물면서 며느리의 언행과 살림하는 모습을 보고 대단히 흐뭇하게 생각하여 "우리집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라며 크게 좋아 하였다 한다. 그의 결혼 생활은 몹시 가난하였고 남편이 학문을 게을리하자 눈물로 호소하기를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사람노릇을 할 수 없고 의리를 버리고 돈벌이만 하는 것은 가난을 참고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바느질과 길쌈은 대강 할 줄 아니 마땅히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부지런히 하여 죽은 잡수시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성현의 글을 읽으시고 살림에는 관심하지 마소서" 그래서 남편 윤광연은 감동하여 사서삼경을 공부하였다 한다. 정일당은 바느질을 하면서 글자의 음과 뜻을 묻기도 하고 한번 훑어보고도 깊은 뜻을 알려 주었다. 이렇게 하여 남편의 학문은 크게 발전하여 선비로서의 위치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한다.
강 정일당은 훌륭한 아내이면서 훌륭한 문인이었다. "우리나라에 신사임당(申師任堂)과 윤지당(允摯堂), 두 부인이 덕행이었는데 사임당은 시만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사서 읽기를 좋아하여 의심나는 곳과 발명한 곳에 있어서 많은 기록을 남겨 놓았고 사임당과 윤지당의 시문을 다 겸해서 잘 했다고 할 수 있다,"라고 권우인이라는 분은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의 애도문 중에는 "아! 유인이시어. 곧고 맑고 고요하고, 순일했으니 얼음같이 맑고 옥같이 윤탁한 자질이요 속에 든 것이 겉에 나타나서 순수하게 이룩한 것은 학문의 공이로세, 아! 유인이시여 어질고 또 효성이 갸륵했으니 시아버지는 현부라 하였고 오솔길을 버리고 큰 길로 인도했으니 남편은 어진 친구라 했네."
대 정치가나 학자의 아내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가난뱅이의 아내였던 그가 친정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 가난도 잊고 성실하게 살아 아무런 배움이 없는 남편을 당시의 덕망 있는 선비로 키워낸 정일당 강씨가 시어머니와 주고 받은 시를 읽어보자.
봄이 오면 꽃은 활짝 피지만
세월이 가면 사람은 점점 늙어만 가네
그렇다고 한탄만 하면 어쩔단 말인가
착한 일 하나라도 더 하는 길 밖에 없네
하고 시어니인 지일당(只一堂)께서 한숨섞인 시 한수를 읊고 나니 며느리 강정일당은 이렇게 읊어 시어머니 마음을 헤아렸다. 배우는 입장에서 아랫사람들은 윤리부터 힘써서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편안히 모셔야 합니다. 곧장 이대로 지켜나가면 이것이 바로 탄탄한 길입니다.